팀 크레인 외, 유토피아



이 책은 실재, 신과 믿음, 선과 악, 앎과 지혜같은 수천년을 통해 반복되어온 고전적인 주제들에서 현대의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철학적 주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부터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만큼이나 폭넓은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백과사전 컨셉의 철학책인데 덕분에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소주제 하나당 5~10장 내외의 간추린 설명으로 진행되다 보니 시식코너를 재빨리 도는 느낌이랄까. 물리적 세계, 초자연 현상, 원인과 결과, 현상학, 진리, 무한, 시간과 공간...등 그 개별적 소주제 하나하나가 전부 묵직한 무게감을 갖고 있는 것들인데 강약리듬도 없이 강강강으로만 700여 페이지를 행진하다보니 머리는 골다공증에 걸린 것처럼 집어넣자마자 밖으로 슝슝 빠져나가는 듯...ㅠㅠ

사실 이 책은 한두달쯤 전 도리네 회사 사내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백여페이지까지 읽다 너무 힘들어 중도포기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일정한 정도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한 채 기술된 백과사전식 책이다보니 피할 수 없는 수박겉핥기식의 밍밍함과 피상성때문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중도포기한 채로 이런저런 다른 책을 읽다 근래에 진화론을 다룬 역작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알게 되어 큰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연과학쪽은 인문사회쪽보다 훨씬 더 문외한이다보니 그 자연과학적인 용어와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도입한 비유조차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의 무지몽매함에 절망하던 중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구입하게 되었다. 자연과학에 단번에 접근하기가 어렵게 느껴져 조금 우회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중에 발견하게 된 책인데 같은 저자의 저술이면서 종교적 이슈(유일신종교)와 저자의 자연과학적인 논리가 결합된 책으로 보여 급흥분모드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마저 수천년에 걸친 종교적 배경지식을 그 근본에 깔고 있어 200페이지쯤되자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휴- 그래서 다시 돌아가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철학>>이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까지 모든 학문에 철학적 사유와 논증이 깔려 있다보니 읽는 책마다 힘들게 느껴지는 곳이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철학에 대한 관심도 막연한 당위성에서 조금씩 구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백과사전식 편집으로 다소 실망스러웠던 이 책도 조금씩 흥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신과 믿음'이라는 챕터는 <<만들어진 신>>에서 논의된 부분과 접목되는 지점이 많아 더욱 골똘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얼마나 절실하냐에 따라 머리가 스폰지가 되기도 하고 골다공증걸린 뼈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그 성격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처음보다는 더 많이 생각하고 더 흥미롭게 받아들이며 후반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백과사전식의 컨셉을 가진 책들은 그 유용성이 좀 애매한 것 같다. 모든 것을 포함한 듯 보이는 컨셉은 욕심많은 초보자들이 쉽게 현혹되는 컨셉이지만 관련된 수많은 모든 지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면의 한계와 개별적인 항목의 피상성은 피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어려운 책이 되어 버린다. 또한 배경지식이 어느정도 갖추어진 중급정도가 되면 더이상 이런 피상적인 문제에 머물러 있는 책이 아닌 좀 더 깊이있고 구체적으로 다루는 책을 찾게 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수많은 논의와 그물처럼 엮인 철학자들의 방대한 역사를 700페이지분량에 담아낸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서양철학사에서 보여지는 논쟁과정은 일면 때로 유치한 말장난같기도 하고 절대적인 보편성을 찾기 위한 무의미한 여정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철학적 유산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서양철학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큰 궁금증이 생긴다. 철학의 논의는 참으로 방대하다.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물음으로부터 사회적 실천과 적용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어떤 학문과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학문의 근본인 것 같다. 철학의 스펙트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것 같다.

그 기획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철학에 대해 나름의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될 때까지 이 책은 나에게 좋은 참고서적이 되어 줄 것 같다. (아...도리네 사내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구나...-_- )

집필 : 팀프레인, 제시 프린츠, 애덤 모튼, 좀 코팅엄, 브렌다 아몬드, 조나단 울프
책임편집 : 데이비드 파피노
번역 : 강유원, 김영건, 석기용
출판사 : 유토피아
분류 : 북리뷰 2008. 12. 22. 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