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우연히 티비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스톤헨지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를 닦으며 리모콘으로 심심풀이 브라우징을 하던 터라 프로그램전체를 집중해서 보지는 못했으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너무 숨가쁘고 비인간적인 현대 사회에서의 탈출구로 농경사회나 시골을 상상하곤 한다. 고된 반복 노동의 현실적 농촌의 모습은 잠깐 제쳐두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져 사는 평화롭고 느린 시골풍경을 한번쯤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소박하고 단순하게 이웃이 함께 정답게 오손도손 웃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 각박한 도시생활에 힘겨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목가적 아카디아의 세계를 상상해 보았으리라. 그 상상의 중심에 농촌과 농경사회는 일종의 포장된 향수로 존재한다. 도시화로 파괴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과 함께 살던 농경사회의 이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신석기문화와 함께 등장한 농경사회가 사실은 도구의 발전이나 혁명적 변화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 한다. 기후의 변화로 수렵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한 곳에 정착해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의 사회에서 존중되었던 여성의 지위가 점차 하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역사 속 농경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늘 낮았지만 그러한 지위변화의 원인이 농경사회로의 전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남성의 근육적 힘이 수렵생활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녔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다른 것이어서 한편으로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렵사회에서는 사냥의 속성상 밤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달의 변화에 따라 사냥의 전략이 달라지기 때문에 달은 당시 인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숭배대상이었다. 보름달은 생존과 직결되는 사냥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류의 지속을 위한 원초적이고 신비스런 역할을 담당한다. 이 역할의 중심에는 생리라는 여성만이 가지는 신체현상이 존재하는데 이 생리주기는 달의 움직임과 변화에 대응한다. 따라서 신성시되는 달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여성이라는 존재는 존중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존중받았고 그 속에 지금과 같은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에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기후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더이상 인간이 수렵으로 생존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인간은 도구로 땅을 파고 갈아 씨를 뿌리고 일년 내내 고된 대지의 노동에 시달리는 농경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계절과 낮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농경사회에서 달은 더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게 된다. 대신 그 자리는 태양이 차지하게 되고 그 이후로 그토록 오래된 태양신의 신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태양은 남성을 상징하고 달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히 여성의 지위가 추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여러가지 상념에 젖게 된다. 여성지위의 하락을 근육의 힘이라는 인간자체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과 기후의 변화, 태양과 달이라는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을 통해 설명하는 것의 차이. 이런 것이 바로 시대에 따라 담론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지위의 하락'이라는 사실은 그대로 있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논의가 그 논의가 이루어지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게 되는 것. 그렇다면 인간을 중심에 놓고 해석을 시도하는 전자의 설명에 비해 인간이 탈중심화한 후자의 설명이 보다 컨템포러리적 해석에 가까운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설명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만 어쩌면 둘은 상호보완적인 설명인지도 모르겠다. 단 하나의 명확한 원인을 갖는 현상이 그리 흔치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농경생활의 시작을 농경혁명이라고 부르는 기존의 설명 또한 역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 나간다는 목적론적 시각에서의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런 목적론적 역사해석 아래 우리는 현대의 고달픈 사회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라 생각하고 쉽게 체념해 버리는 게 아닌지. 목적론의 폐해를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몸뚱이는 구석진 곳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단순하고 명쾌한' 목적론에 젖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스톤헨지는 수렵생활을 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 신석기인들의 향수가 반영된 기념물이라는 어떤 학자의 해석을 접하니 농경사회에 대한 현대인들의 낭만적 향수가 오버랩되는 것 같다. 농경사회가 정말 행복한 사회였는지, 오랜 옛날의 수렵사회는 정말 행복한 사회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아직도 자유롭게 이동하며 수렵-채집생활로 살아가는 오지의 부족사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발전'하지 못한 미개한 원시인들인가. 우리는 과연 그들보다 행복한가.

이 다큐프로그램의 학자는 스톤헨지를 통해 정치권력과 관련한 인간의 오래된 사회현상도 설명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자꾸 그 고고학자의 이야기가 문득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보면, 기차니즘을 극복하고 그 프로그램을 찾아 처음부터 꼼꼼히 다시 한번 봐야할 듯 싶다.
분류 : 생각 2009. 6. 29.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