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소화 흡수되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처음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미술로 빠져든 이후 열정적이고 다소 성급한 마음에 미술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얼른 둘러보려고 바둥댔으나. 내 메모리와 감성은 늘 계획을 따라잡지 못했다. 인상주의에 빠져 있을 때 후기인상주의를 빨리 공부하고 싶었으나 재미가 없었다. 후기인상주의에 빠져 있을 때는 그 이후의 모던 미술도 두루 섭렵하고 싶었으나 힘들었다. 늘 이런 식이어서,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으로 돌아가려는 성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냥 마음가는대로 조금씩 천천히 공부하자고 괜히 급해질때마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마음이 산책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래서 지금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인상주의와 겹치기도 하는, 인상주의 바로 직후의 다양한 미술활동과 화가들에 대해 읽고 있다. 중세나 바로크, 고전주의 또는 폭발적인 현대미술운동으로 좀 더 들어가고자 했던 계획은 무기한 연기인 셈이다.

<The Nabis>를 읽으면서 뷔야르가 점점 좋아지고 보나르에 대한 호감도 커졌는데 이들이 아르누보나 생활미술과 관련이 많은 것을 알게 되니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아르누보에 대해서도 이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슬슬 되는 것 같다. 아마 아르누보를 통해 클림트나 빈의 세기말 미술, 그리고 프로이트로까지 관심을 가져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책과는 관련없는 곰도리 그림 ㅎㅎ


요즘 <The Nabis>와 함께 읽고 있는 책은 앨런 보네스 Alan Bowness 의 <모던유럽아트>인데 마네로부터 시작해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모던아트에 대한 논의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1900년 이후의 미술사>라는 정말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어렵고 지금의 나로서는 소화해내기 힘든 정도의 책이어서 조금 더 쉽고 평이하게 화가들이나 미술운동의 역동성과 관련성을 다룬 책을 읽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모던유럽아트>의 저자의 시각은 아직 내 나름대로 판단할 수준에 있지 않아 섣불리 언어로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같은 것을 다양하게 바라보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의미를 찾아내는 다양한 비평가나 미술사가들의 에세이가 굉장한 재미를 준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꽤 익숙해진 인상주의와 관련 화가들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감명을 줄 정도로 와닿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니 기억이 안나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_- ),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챕터에서는 상당히 집중하고 있는 나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인상주의 직후의 모던아트의 발흥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모양이다.
반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챕터는 읽으면서 졸고 있는 나를 문득 발견하고야 만다. 아직 거기까지는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같은 저자의 글들이 부분부분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아무튼 이 책은 내게 한 걸음 더 내딛도록 하는 큰 자극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있는 독서가 되었다.

이 책을 읽고 특히 관심이 생긴 부분은 몬드리안과 추상미술에 관한 것.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복잡하고 상반되는 감정들이 있었는데 현대 상업미술 및 디자인, 현대 건축의 혁명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어 아주 후련해진다. 짧지만 통찰력이 돋보이는 조각과 건축에 관한 논의도 좋다.


모던 유럽 아트 - 인상주의에서 추상미술까지
앨런 보네스 지음, 이주은 옮김/시공사

분류 : 북리뷰 2009. 5. 14.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