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한번쯤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계기가 있다. 올해는 문득 '요리'를 직접 해보고 싶어졌다. 집에서 늘상 먹는 된장찌개나 콩나물무침 말고 내가 하기엔 벅차다고 생각했던 그런 '요리'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유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듯 내 변화에도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위염의 재발. ㅋㅋ 먹는 것에 신경쓰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닥친 것이다. 대단한 작심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죽지 않을려고 밥 신경써서 해먹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 특히 30대 여성들이 위암에 흔히 걸린다는 이야기를 몇년 전부터 꾸준히 들어왔는데, 올 가을의 장진영씨의 사망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나도 작년 티비에서 위암으로 죽은 30대초반의 안소봉씨가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 주변에 아는 사람이 위암으로 수술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암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년 심한 위염으로 몇달간 고생을 한데다 위염이 만성으로 변한듯 예민해져서 항상 신경이 쓰이던 차에 왼쪽 윗배에 설명하기 어려운 결림과 묵직한 증상이 언젠가부터 나타나고 피부염재발때문에 먹은 한약이 갑자기 위염증상을 일으키면서 걱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게다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전에 위를 절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모르고 있던 '가족력'이 갑자기 생긴 터였다. 걱정이든 불안이든 이런 격정에 휘둘리면 내시경밖에는 방법이 없다. 다행히 평범한 위염이외의 다른 소견은 나오지 않았고, 내시경 예약일을 기다리는 내내 시달렸던 어지럼증, 호흡곤란, 가슴 답답함과 각종 망상들은 내시경결과를 알기가 무섭게 감쪽같이 사라졌다. 초안을 작성중이던 유언장도 차후에 쓰기로 연기하고, 추석날 글썽이는 눈으로 보름달을 바라보며 달님께 기도했던 '5년만 주세요'는 어느새 10년으로, 20년으로, 아니 '60까지만 살게요'로 바뀌어 간다.



먹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새삼스레 하면서 손수 음식을 장만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을 즐겁게 먹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손놀림이 재빠르지 못하고 집안일에 요령도 취미도 없는데다 만성질환까지 있어서 식사준비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의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기 싫어, 왜 해야하지 투덜대기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일 저녁, 그러니까 일주일에 다섯번만 밥을 하자. 닥쳐보니까 죽기는 싫잖아. 매일매일 밥을 하는 것보다 죽는 것은 더 싫잖아. 게다가 먹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기도 하니까.

나의 첫번째 특별(?)요리는 전주비빔밥. 인터넷으로 적당한 요리법을 찾아내고 쪽지에 사야할 재료를 적어 하나로마트로 갔다.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니 귀찮은 장보기도 즐겁게 느껴진다. 불고기용 한우를 사고 도라지, 취나물, 고사리, 콩나물, 애호박을 샀다. 전부 다 내가 직접 데치고 무칠 계획이었는데 도라지와 고사리와 취나물은 그냥 데쳐 놓은 것을 사왔다. 간단한 한끼 식사의 대명사여서 가볍게 시작하려고 비빔밥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재료준비부터 좀 번거롭다. 컴퓨터앞과 싱크대앞을 왔다갔다하며 겨우겨우 다 준비하고 달걀지단도 부치고 볶음 고추장도 만들고 냄비밥까지 하고 나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평소 반찬 하나 또는 찌개나 국을 하나만 준비하면 지쳐 나가떨어지는 나였는데, 비빔밥을 해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7종류의 반찬을 만들었으니 참 대단하다. 고사리, 취나물, 도라지까지 생나물을 사왔더라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결과는 대만족. 조금 과장해서 그렇게 맛있는 비빔밥은 처음 먹어 봤다. (개지순이 생각나는 대목이군 ㅋ) 내 요리에 완전 자뻑모드가 되어 한 입 먹고 '최고야 최고', 또 한 입 먹고 '내가 만든 비빔밥이 어쩜 이렇게 맛있지' 감탄사를 연발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곰도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먹다가 다 토하고 도망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ㅎㅎㅎ 곰도리도 천상의 비빔밥맛에 매우 감탄했다. ㅋㅋ


해보니 된다! 며칠 후 이번엔 뭘 할까 슬슬 고민을 하면서 애청하는 케이블채널 FOX에서 재방송해주는 일일드라마 <있을 때 잘해>를 보고 있는데, 하희라의 시어머니가 삼계탕을 하는 게 아닌가. 우와 저런 것도 집에서 하나 감탄하다가 갑자기 '나도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시간 걸리는 전주비빔밥도 했는데 삼계탕이라고 못하겠어? 사기는 충천했고 삼계탕은 선택되었다. 비극의 시작이다.

역시 인터넷을 검색하고 준비해야 할 재료를 적어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번거로운 비빔밥에 비하면 이건 장난이다. 영계 2마리, 찹쌀, 수삼 3뿌리, 영양부추, 밤을 사고 시골에서 보내주신 잘 말린 대추와 마늘을 준비했다. 재료도 간단하고 요리법도 썩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첫번째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닭 손질하기. 내장이 다 제거되고 깔끔하게 손질된 영계이긴 한데 이거 영~ 만지는 촉감이 무섭다. 닭을 들고 씻는 것도 좀 무서운데 잘린 목이 자꾸 이리저리 축 늘어뜨려져서 약간 공포스럽다. 그래도 맛있는 삼계탕만 생각하며 여러번 물로 헹구고 빈 속에 불린 찹쌀과 밤, 대추, 마늘을 넣었다. 상상같은 건 안하고 빨리 해치우고 싶었는데, 한쪽 다리에 칼집을 넣어 다른 다리를 그 속에 집어넣어 교차시키는 데 아주 진땀을 뺐다. 닭의 살이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정말 소름이 돋아 죽겠다.ㅠㅠ 게다가 공장식 사육장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키워지는 장면, 컨베이어벨트에 매달려 기계적으로 손질되는 장면들이 떠올라 참 괴롭다.

어쨌든 무사히 닭 손질을 마무리하고 수삼을 우려낸 국물에 준비한 재료를 넣어 푹 끓여주었다. 제대로 된 삼계탕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하지만 비빔밥을 성공리에 마친 자신감에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딱 여기까지. 결과물은, 국물맛은 좋은데 닭맛이 실패. 깊은 냄비가 없어 평소 사용하는 넙적한 국냄비에 끓였더니 닭의 등이 일부 수면위로 노출되어 고기가 질겨진 것이다. 흑... 닭손질하느라 무서워서 식은땀까지 흘렸는데... 질겨진 닭살을 뼈에서 발라내느라 곰도리와 나는 대화도 못하고, 9시에 꼭 봐야하는 chCGV의 svu10은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한시간내내 살을 발라내느라 젓가락을 든 손에 힘을 주다보니 나중에는 짜증이 팍팍 났다...


그래도 배운 게 있으니 다음번에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2번 해서 한번 성공이면 괜찮은 편이다. 성공률보다 중요한 건, 요리를 하면서 즐거웠다는 점, 그리고 내가 한 음식이 점점 맛있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ㅎㅎ 다음에 우리집에 손님이 오면 나는 내가 잘하는(ㅋ) 전주비빔밥을 대접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일단 한번 잘 먹어보겠다는 열정이 식지 않았으면 좋겠고, 음식을 손수 해 먹는 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처럼 조금씩 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분류 : 나니도리 2009. 10. 15.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