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렵고 모호하다고 느끼는 것은 많은 부분 철학의 광범위함때문이 아닌가 싶다. 철학사를 읽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철학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주로 '형이상학'적 모습의 학문이었다. 철학사를 읽으면서 철학은 아주 폭넓은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철학의 테두리는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넓혀지고 그 모양새도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학문이든 이런 면을 갖고 있겠지만 철학은 그 성격이 특히나 더 유동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식론, 존재론, 형이상학, 법철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종교철학(신학), 도덕철학(윤리), 언어철학, 논리학 같은 철학의 분야들은 다른 학문과 긴밀히 연관되어 왔고 새로운 학문으로 분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철학사책이 이런 다양한 철학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다종다양하고 광범위한 철학의 성격이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렘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도 다른 많은 철학사책들처럼 시대순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루는 철학자들이 지나치게 많지 않고 적절히 제한되어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세계철학사>의 철학자에 대한 방대한 언급에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환영할만한 점이었지만 몽테뉴, 마르크스 등 기대했던 철학자들이 따로 다루어져 있지 않아 실망스럽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저자가 판단하는 '철학자'의 조건에 마르크스가 부합하지 못해서일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특히 좋았던 점은, 개념의 차이에 대해 저자가 거듭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대로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철학을 어렵게 느끼게 하는 어쩌면 가장 큰 이유가 개념어에 대한 이해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개념어에 대한 이해 자체도 어려운데 철학자마다 같은 개념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아 한층 더 어려워지고,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왜곡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렘프레히트는 이런 점에 대해 꾸준히 지적하고 같은 개념어의 다른 용법에 주의를 기울이게 해준다. 가령 나는(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변증법이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헤겔의 용법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고대 철학자들의 변증법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플라톤과 칸트와 헤겔에 있어서 '변증법'이란 용어가 각기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렘프레히트의 설명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 철학에 있어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반복적으로 자극을 받게 되어 참 좋았다.


저자가 미국학자라서인지 후반부에 미국철학을 따로 다룬 것은 다른 철학책들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영미철학은 전통적으로 유럽대륙철학에 비해 경험론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프랑스나 독일의 철학자들에 비해 영미철학자들이 꽤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칸트, 헤겔같은 철학자들보다 영국의 버클리, 로크, 흄 등과 미국철학자들이 더 강조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의 18세기 계몽철학시대의 많은 프랑스 사상가들에 대한 설명은 형평성에 어긋나 보일 정도로 생략되어 있어 놀라웠는데, 저자의 관점이 대폭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찾아 보니 <서양철학사>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가 <Our Philosophical Traditions>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닌 듯싶다. 이 책의 그런 특성덕분에 얻은 소득이 있다면 산타야나라는 호감형 미국철학자를 알게 된 것.
 
이 책을 읽느라 한달을 꼬박 비몽사몽속에서 헤맸다. 읽다 보면 10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하고 졸음이 쏟아졌고 덕분에 한달동안 거의 매일 낮잠을 잤다... 두꺼운 통사의 압박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손에 달랑 들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진짜로 얇은 책을 좀 보면서 재충전을 해야겠다.


서양 철학사
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 외 옮김/을유문화사
분류 : 북리뷰 2009. 8. 9.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