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잠이 깨면 동백아가씨를 부르고 하루종일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하며 그 옛날 엄마가 흥얼거리던 가사를콧노래부른다.
자주 우울하던 엄마는 아주 가끔 반짝이는 새 커튼과 감미롭고 여린 노랫소리로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 나를반겨주었다.
나즈막하고 부드러운 그 평화가 나는 참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큰 마음을 먹고 <춤! 조갑녀> 공연예매를 했다.
지난달에 가고 싶었던 국악공연을 여건이 여의치 않아 못갔던 터라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는 갑절로 굉장한 정도였다.



한시간전에 도착한 국립국악원에서 표를 찾고 커피를 한잔 들고 야외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여기저기 관람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오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국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처럼 보였다.
서로 아는체하며 반가워하고 '선생님, 저 누구예요.' 하는 인사가 곳곳에서 들린다.
우리같은 일반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대중속에서 잊혀져가는 현실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씁쓸해왔다.
곰도리와 함께 누가 일반인인지 누가 국악인인지 알아맞히기 놀이를 했다.

<춤! 조갑녀>공연은 1930년대 남원권번의 명무였던 조갑녀선생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연이라고 했다.
예인집안의 딸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예인의 길로 들어섰던 그는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었고
혼인을 하면서 예인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수십년을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온 그를 우연한 사진 한장으로 알게 되어 수소문과 각고의 설득끝에 세상으로 이끌어낸
국악인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고 했다.
약 5년전의 큰 사고이후 그는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나이 87세이다.

이 공연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담겨진 무대였다.
약 5분간의 조갑녀선생님의 살풀이공연을 위해 후배들의 축하/찬조공연이 일곱 무대가 앞섰다.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사풍정감, 교방춤, 채상소고춤, 도살풀이춤까지.
그분들의 춤은 너무 아름다웠고 너무 유쾌했고 너무 관능적이었다.
이 땅에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저토록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니.



조갑녀선생님의 무대는, 공연이 아니었다. 그냥 그분의 인생이었다.
삶이 마디마디 맺힌 춤은 진정 춤이고 인생이었다.
인생에서 우러나오는 그 춤은 어떤 기교로도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분의 깊은 주름살은 춤에 녹아들고 서 있는 그 자체로 춤이 되었다.

이런 노 명무, 명창들의 세대가 스러지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문화를 한자락씩 잃어간다.
나중에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모습들이 사라져간다.
그래서 이 국악인들의 잔치가 너무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에게 국악이나 전통문화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고리타분한,
무관심의 영역에 있는 듯해서.



공연이 끝나자 로비에서 바로 뒷풀이가 이어졌다. 사물놀이와 춤이 어우러진 한 판.
사람들은 너나없이 카메라를 꺼내 다시 없을 이 광경을 분주히 담았다.
어중간한 카메라때문에 나는 사진도 제대로 못찍고, 그렇다고 뒷풀이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성능좋은 카메라였다면 사진이라도 잘 찍어보았을 텐데.
차라리 고물카메라였다면 사진은 포기하고 흥겹게 춤이라도 췄을 텐데.
이도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어깨만 들썩이다 왔는데
고관절이 쑤시고 통증이 오는 걸 보니 어깨만 들썩이길 잘한거다 싶다. ㅠㅠ



건물 외벽에 내걸린 커다란 <춤!조갑녀>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멀리서 아련한 북소리가 들려오니
현수막속의 그가 금방이라도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 같다.
치맛자락을 한뼘 잡고 버선발을 살짝 보이며 사뿐사뿐 걸어나올 것만 같다.

관람객으로 참여한 장사익씨가 깜짝이벤트로 무대에 잠시 섰다.
그의 동백아가씨를 듣는 순간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 순간에 삘이 꽂힌 동백아가씨를 며칠째 벅스에서 듣고 노래하다보니
조갑녀선생님의 지난 공연을 찾아 동영상으로 수십번씩 보다보니
이젠 명무 조갑녀가 동백아가씨가 된다.


분류 : 기타 2009. 7. 29. 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