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입문하자마자 우당탕탕 장애물경기를 뛰는 느낌이다. 가뿐하게 잘 뛰어넘어 성취감으로 기쁜가 하면 장애물에 채여 넘어지고 까지기도 한다. 남경태의 <철학>에 이어 고른 책은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철학사>. 약간의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을 가미한 주로 서양철학사인데 분량이 1200페이지를 넘어선다. 첫대면부터 긴 코스 장애물경기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약 2500여년동안 철학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거나 적어도 한발쯤 걸치고 있는 사상가들과 주제들에 대해 개괄하고 있는 <세계철학사>는 철학개론서이자 입문서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입문자의 모호하고 허약한 위치와 입문서의 두루뭉실한 컨셉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입문이나 개론이라는 것이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또한 방대한 철학의 자취를 한 권의 저술로 압축했기에 통사가 가지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텍스트는 통사가 빠질 수 있는 목적론적 고찰에 대한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점은 입문자의 위치에 있는 독자에게 편견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큰 장점이지만 때때로 읽어내기가 힘들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남경태의 <철학>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책이다. (남경태님의 저술은 저자 자신의 명확한 컨셉이 있는 스타일이다.) 남경태의 <철학>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다 읽어내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재미있는 책이다. 방대한 분량때문인지 내 컨디션의 업다운이 심한 시기에 책을 읽어서인지 매우 재미있고 흥분되는 감정과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감정이 자주 교차했지만 꼭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고 앞으로 철학읽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자주 참조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호기심을 느끼게 된 철학자들이 있다. 몽테


뉴,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헤라클레이토스 등인데 1500년대의 철학자인 몽테뉴의 글은 지금 읽어도 매우 '현대적'이라는 저자의 말에 굉장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역시 볼테르, 루소, 마르크스처럼 고뇌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다 간 인물들에 호감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 칸트와 하이데거 등은 너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 시작부터 탁탁 막히는 것을 보니 앞으로 칸트랑 하이데거랑 친구하기 좀 어렵겠다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한가지 대단한 성과가 있다. 아주 사소한 진리, 2500년전의 인간도 지금의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지금처럼 대단한 과학기술적 토대가 없었던 그 시대에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똑같이 다양하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았고 그 다양성의 구체적인 모습들도 지금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이나 형태와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 그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야 더 옳은 말일 것이다. 철학입문서에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A라는 철학자는 세계의 본질이 불이라고 했고 B라는 철학자는 흙이라고 했고 C라는 철학자는 원자라고 했다는 식의 바보같은 왜곡이 아닐까. 심한 압축과 단순화는 흔히 왜곡과 편견을 낳으니 말이다. 이 책은 개론서이지만 적어도 그런 왜곡으로 고대인을 우습게 보는 편견을 갖게 하지는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 부분을 읽으며 나는 마음 한구석에 있던 또 하나의 편견을 내던져 버릴 수 있었다. 우리가 꾸준히 곱씹는 유학사상은 2500년전의 중국의 사상가들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인도의 현재를 관통하는 종교와 철학도 2500년전의 그것과 썩 다르지 않다. 서양철학 또한 언제나 과거의 사유가 새로운 사상가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될 뿐 완전히 새로운 창조란 없다. 특히 답이 없는 문제, 형이상학적 물음을 제기하고 답하는 인간의 모습은 정말 무릎을 칠 정도로 고대인과 중세인과 현대인이 꼭 닮았다.  

이 책은 철학입문서로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견줄 만한 책인 것 같다. 50여년의 역사와 영향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에서도 비슷하지만 내 공부과정에 끼친 영향과 효과면에서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비견될 만하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철학읽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많은 철학자의 이름과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철학의 탐구는 미술보다는 한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지만 몽테뉴의 <수상록>은 괜찮은 시작이 될 것 같다.




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이룸
분류 : 북리뷰 2009. 7. 15.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