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레크의 그림을 보면서 처음 '미완성의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인상주의'로 평범하게 입문한 서양미술사에서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도 '미완성의 완성' 또는 여백의 미를 찾을 수 없어서 가끔 숨통이 탁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는데 로트레크의 그림에서 드디어 여백을 발견한다. 자유로운 필치, 물감을 칠하지 않고 남겨둔 공간, 스케치하듯 슥슥 빠르게 움직인 그의 붓놀림에서 시원한 해방감을 느낀다.

여백의 아름다움
서양미술사에서 현대미술 이전 시기까지 물감을 칠하지 않고 남겨둔 공간이 있는 그림을 '습작'이나 '미완성'이라고 여겼던 사실은 '여백'이라는 개념에 익숙한 동양인들에게 참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동양적인 '비어있음'의 미, 반형태로서의 형태, 비공간의 공간이라는 역설을 오랜 전통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해 온 사람들에게 색채와 형태로 가득찬 서구의 전통적 그림들은 가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의 '완성작'도 멋있고 대단하지만 화가들의 '습작'이나 '스케치', '드로잉' 같은 구석에 작게 소개된 그림에 더 이끌렸던 것은 여백을 커다란 미술적 오브젝트로 느끼는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감정일 것이다. 물론 모더니즘 이후의 서양미술에서는 여백이나 미완성을 중요한 하나의 가치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서양의 현대미술교육을 그대로 좇고 있는 우리의 교육으로 인해 어릴때부터 동양적 전통과 서양적 현대미술이 자연스럽게 섞여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현대미술 이전의 회화의 형식과 기법은 동양과 서양에서 미술 이면에 있는 철학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로트레크는 캔버스를 채워야 한다는 암묵적인 법칙에 어긋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물론 그가 '완성작'으로 그린 그림들은 여전히 전통을 존중한 꽉 찬 그림이 대부분이긴 하다.) 그의 그림에는 칠하다 만 듯 보이는 색채와 마분지의 배경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주 많다. 그의 그림은 무척 자유분방해서 지금 보아도 현대적이고 놀랍게 느껴진다. 아마 이 느낌-우리 시대의 맥락속에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으로 보이는 - 이 현대미술과 그 이전 시기의 미술을 구분짓는 자연스럽고 직관적인 경계선이 아닌가 싶다. 그런 느낌을 기준으로 본다면, 인상주의의 그림들은 전통적이면서 조금 덜 전통적으로 보이고 후기인상주의의 그림들은 현대적이지만 완전히 현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단명한 수많은 '주의'로 표현되는 20세기초 현대미술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그림이 정말 현대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은 회화의 전통 법칙이라는 오래된 암묵적인 약속들의 급진적 변화같은 것으로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로트레크의 그림은 매우 세련되고 모던하다. 전통을 존중하는 과거에 대한 대접을 일부러 해주지 않아도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매우 현대적이다. 그의 그림은 이후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뭉크와 에곤 쉴레 같은 또 다른 아주 '현대적'인 화가들에게 말이다.

자유로운 선
로트레크의 그림에 보이는 무진장 자유로운 선을 보면, 열정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동안 '유화'라는 것은 무겁고 불투명한 그림의 동의어쯤으로 생각해 왔는데 로트레크의 유화작품들은 그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유화는 색연필이나 파스텔로 그린 듯 가볍고 자유롭다. 충만한 열정으로 빠르게 스케치하듯 그려가는 그의 자유분방한 필치는 부럽고 경이롭다.

사람에 매혹되다
로트레크 그림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그의 그림이 정말 좋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의 화풍을 더 의미있게 느끼게 해 주는 인물화가 정말 많다는 것. 타고난 신체의 약점때문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드러냄으로써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로트레크는 특히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그들의 일상, 물랭 루주같은 당시 파리의 밤문화를 대변하던 향락의 장소와 관련된 사람들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그림들은 에로틱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적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다소 대비되는 그의 스케치풍 기법과 마무리가 덜 된 듯 raw한 느낌의 화풍과 어울려 상당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느낌이다...

로트레크의 인물화는 너무 매력적이다. 고흐나 에곤 쉴레, 로트레크처럼 요절한 화가들은 모네나 르누아르처럼 오래 살았더라면 그들의 그림이 어떻게 변해갔을지 어떤 굴곡을 겪었을지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수많은 더 멋진 작품들을 남겼을텐데.. 아쉽고 안타깝다.

Taschen의 Basic Art 시리즈
이 기획시리즈로만 거의 10권 정도의 책을 산 모양이다. 베이식아트 시리즈는 책이 워낙 얇아서 (90여페이지) 사실 인물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느낌이 생기지 않는데 로트레크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이지수에 비해 비교적 알찬 도판으로 그럭저럭 위로를 삼게 되는 입문서이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경우 저자인 마티아스 아놀드의 텍스트는 도판이 없는 작품들까지 이것저것 나열하고 있어 많이 아쉽다.

로트레크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고 도판이 더 많은 다른 책을 찾아봐야겠다. 뛰어난 구성감각, 색채감각, 선, 포스터, 판화작품들까지 로트레크의 그림에 대해 더 많이 보고 싶고 더 많이 알고 싶다. 로트레크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뭉크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긴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마티아스 아놀드 지음, 박현정 옮김/마로니에북스
분류 : 북리뷰 2009. 4. 6.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