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참 접근하기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등을 비롯, 총 7부 14권(국내11권)인 방대한 원작을 분량을 줄이거나 만화로 표현하거나 하여 좀 더 읽기 쉽게 소개한 책들이 참 많이도 나와 있다. 나도 십여년 전 한 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산 적이 있는데 그 책이 원작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원작 중 제1부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1>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었다. (그때 그 책을 한장도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 -_-; ) 첫번째 권을 읽어본 결과, 그 수많은 축약본과 만화책들이 왜 필요한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분량이 방대한 대작이기도 하거니와 한문장이 5줄,10줄로 이어지는 호흡이 아주 긴 문체는 서너장 읽을 때마다 꼭 한번씩은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 같은 의구심을 갖게 하고, 이해못할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참다참다 급기야는 책을 던져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원작을 놓기가 어려운 이유는, 결국은 읽게 될 것이고 또 읽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근대 유럽의 문화사를 공부하다 보면 결국 프루스트를 비껴가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은 거의 확신에 가깝다. 요즘 읽고 있는 유럽 근대 미술사나 인상주의, 당시 화가들, 문필가들의 이야기에 프루스트나 프루스트의 소설 등 프루스트와 한다리만 건너면 연결되는 소재가 적어도 하나쯤은 나오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을 듯 하다. 그래서 나도 축약본이나 만화책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원작을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원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회화적인 비유나 상징을 담고 있는 명문들을 뽑아 관련 미술작품과 함께 구성한 책이다. 이 책을 편집한 에릭 카펠리스 Eric Karpeles 는 각 페이지마다 짧고 적절한 설명을 달아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길잡이를 마련해 준다. 심상이나 심리묘사 등에 비해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지만 그래도 듬성듬성 뽑아 놓은 짧은 문단들만으로는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각적인 묘사나 예술에 대한 묘사가 차지하는 부분은 참 크다. 프루스트 자신이 친구 쟝 꼭또에게 한 이야기처럼 그의 책은 '일종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가진 재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아 언어의 한계를 실험하고 그것을 통하여 관념을 시각화한다. 그의 소설은 언어와 문학과 시각예술이 통합된 종합예술이다. 편저자는 이렇게 시각예술화된 프루스트의 원작에서 특히 회화와 관련있는 부분들을 뽑아 200여점의 도판과 함께 원작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원제가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PAINTINGS IN PROUST.

이번 독서는 참 좋은 느낌이었다. 이 책은 원작의 가치를 빛나게 해주면서도 그 자체로도 독자적인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인간사의 단면에 대한 프루스트의 통찰이 담긴 명문들은 소설의 줄거리를 벗어나 있어도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또한 그와 관련되어 르네상스시대부터 인상주의시대를 넘나드는 회화작품들은 원작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을 조금 더 쉽고 흥미있는 것으로 바꾸어 준다. 앞으로 원작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 이 책은 가끔 달콤하고 나른한 휴식이 되어 줄 것 같아 든든하다.

더하여.
소설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화가 친구인 엘스띠르에 대한 이야기에 마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실려 있는 것을 보니 프루스트가 당시 새로운 고전의 대열에 합류하며 인정받기 시작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작중 인물에 대한 영감을 얻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상주의를 비롯한 19세기 중반~ 20세기 초의 유럽 미술사에 집중하고 있는 나에게도 또 다른 자극이 되어 주었다.

아래는 책 속의 한 장면.
요즘 인상주의에 대해 올인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급 방긋 모드가 된다.ㅎㅎ

그는 과거에 충격적이라고 여겨졌던 작품에 끼치는 시간의 영향에 대하여 명상을 계속한다.

하지만 사교계 인사들 중 가장 연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 동안에 세월이 자기들을 작품들로부터 멀리 이끌어갈수록, 앵그르의 것처럼 자기들이 걸작품이라고 하던 것과 영영 '끔찍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던 것(예를 들면 마네의 <올랭피아>)간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점차 줄어들어, 두 화폭이 마치 쌍둥이처럼 보이게 된 것을 목격했노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성으로까지 내려갈 줄 모르고, 과거에 전례가 없었던 어떤 체험을 앞에 놓고 있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가르침도 얻지 못한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쟝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분류 : 북리뷰 2009. 2. 17. 0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