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오직 그림만을 위해 살았던  세잔(Paul Cezanne 1839~1906)과 그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Taschen사의 Basic Art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세잔의 일생과 그의 그림세계를 대표작 70여점과 함께 구성한 <폴 세잔>은 그림이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던 세잔, 색채를 통해 빛과  형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함으로써 20세기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히고 마티스와 피카소를 비롯한 후대의 미술가들에게 선구자같은 존재가 된 세잔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깔끔한 입문서가 되어 주었다.

폴 세잔은 전형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복잡하고 예민하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을 가진, 쉽게 흥분하고 때로 과격하며 광기 어린 열정으로 그림에 몰입하는 사람. 내향적이고 원시적이며 아이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  집요하게 탐구하고 섬세하고 대담하며 격정적이면서 동시에 초월한 모순되는 성격을 가진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던 세잔은 파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점차 은둔하게 되는데 일생동안 그를 매혹시킨 고향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빛은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는 키워드인 이 말을 나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아마 이 책을 읽기 전에 인상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고 그 속에 나온 세잔을 그의 인상주의친구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상주의화가들의 중심에는 빛이 있었고 빛은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의  형태와 색을 결정하는 주체였으므로 색채가 주체가 되고 빛이 대상이 되는 세잔의 개념을 인상주의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젊은 시절 세잔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인상주의화가인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 1830~1903)에게 인상주의 기법을 배우기도 하는 등 인상주의 친구들과  개인적으로 기법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인상주의 그림이 지나치게 일시적이며 순간적이라고 느꼈던 그는 점차 인상주의와 멀어지게 된다. 세잔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넘어선 대상의 본질, 즉 그것들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형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p.46).  원시적인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 자신의 시각으로 지각하고 이렇게 지각된 자연을 영속성과 불멸성을 가진 대상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통해 세잔은 그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고 그에게 색채는 형태와 빛을 표현하는 궁극적인 수단이 되었다.  전통적인 선 원근법이나 인상주의의 원근법이 아닌, 색채효과와 공간구성으로 깊이감을 창출해 내는 기법이나 엄밀하게 구성되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신중한  창조작업은 현대적 '구성'의 개념, '디자인'의 개념, '창의성'이 전제된 '예술'이라는 개념에 토대가 된 듯 느껴진다. 말년으로 갈수록 구성의 개념이 발전하고 더 추상적으로 변모해가는 세잔의 그림은 동시대의 후배 화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게 만들었다. 그의 말년 대작인 일련의 <수욕도(bathers)>에서는 피카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보아도 여전히 세련되고 모던한 그의 작품에서 후대의 현대미술이 잉태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책의  텍스트는 다소 무미건조한 문체여서 글을 통해 세잔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찾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긴 분량을 압축요약한 듯한 글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별로 없었다.  90여 페이지로 제한된 분량의 기획시리즈, 그리고 배경이나 문맥보다 한 사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인물사'적인 구성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후반부의 세잔의 예술철학에 대한 부분은 조금 난해하기도 하지만 두세번 정독하고나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만족할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알뜰하고 성의있게 구성된 70여점의 도판은 그의 40여년동안의 스타일변천과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조금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들고  다니면서 보기에 전혀 부담없이 느껴지는 가벼움과 질좋은 도판은 한번씩 꺼내보며 참고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분류 : 북리뷰 2009. 2. 6. 00:06